[기사입력일 : 2010-03-30 11:44]
침체, 일로에 있는 오페라계(제132호)



영역은 분명 음악분야에 속해 있지만 음악만으로는 본연의 기능을 갖출 수도 없고, 당초 성립조차 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 그것이 바로 노래하는 연극이라는 뜻의 '가극', 즉 오페라다. 오페라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음악 이외에도 대본이 있어야 하고, 줄거리와 노래에 따른 동작, 즉 연기와 춤이 있어야 한다. 또한 무대의 장면 설정에 필요한 배경의 '세팅', 즉 장치가 있어야 하고 등장 인물들이 입어야 할 의상에 등장 인물의 설정에 따른 분장과 무대 장면에 필요한 소도구들이 준비되어야 한다. 따라서 오페라는 음악 외에 문학, 연극, 미술, 무용, 의상, 분장 등 여러 자매예술의 요소들이 결합이 되어야 제 기능을 갖출 수 있고, 또한 성립의 조건들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기에 흔히들 오페라 무대 양식을 '종합예술'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러한 요소와 여러 기능을 실제 무대를 꾸미기 위해 동원되는 이른바 오페라 요원이라고 하는 인적 자원이 또한 만만치 않다. 주연, 조연, 합창 등 노래하는 성악인들 외에도 많은 무용수와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어야 하고 무대 구성을 주로 감독하는 연출자와 지휘자가 필요할 뿐더러 무대장치를 설치하는 감독과 조명을 맡는 조명감독 외에 작업하는 요원과 그밖에 뒤 스탭진 용도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오페라의 무대양식은 막대한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을 동원해야 구성이 가능한 특수한 분야다. 따라서 한 편의 오페라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제작비가 소요되며 소규모일 경우에도 최소한 수 천만원, 일반적 무대구성에도 수 억원의 경비가 소요된다. 따라서 오페라 운동은 어느 개인이나 민간 단체가 자력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행정부나 지방 자치단체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 하고 또한 지속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 오페라의 실정이다. 이러한 특수성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 오페라이기에 서구 선진들은 거의 대부분 오페라단을 국립으로 정부가 운영하고 있다. 주연급은 외부에서 그때그때 초청할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출연자와 뒤의 스탭들, 즉 오페라 요원들은 국립오페라극장에 전속되어 매월 봉급을 받으며 공무원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 정상급인 오스트리아 비엔나 국립 오페라 극장,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 파리오페라극장, 독일 뮌헨국립오페라 극장 그밖에 대부분이 국립으로 정부 예산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오페라는 이와 같이 막대한 재정과 인적자원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문화의식과 예술기능의 발전, 여기에 재정의 뒷받침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 하기에 오페라 운동은 그 나라 국력의 상징이 되고 또한 국력과 비례하기 때문에 오늘날 선진국들과 중진국 중에서도 상위의 일부 국가에서 오페라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대부분의 후진국과 약소국에서는 오페라 운동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우리나라 오페라 운동의 발단은 해방 직후인 1984년 1월, 오페라계의 선각자 이인선이 이끈 국제오페라사란 민간 단체에 의해 베르디의 오페라 '춘희', 즉 '라트라비아타'(지휘 임원식, 연출 서향석)를 서울 명동에 있는 시공관(후에 국립 예술극장. 현재 복원중)에서 공연한 것이 역사적 효시가 된다. 당시 약소국으로는 빨리 시작한 편이고 그러기에 오페라 역사도 이제는 60년을 헤아리게 된다. 지금 당시를 도리켜 봐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전설 같은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안하고 혼란기에다 아직 정부가 수립되기 전, 미군이 진주해서 38선 이남에 군정을 펴고 있을 때이기에 오늘날처럼 정부의 지원이나 이렇다 할 기업체도 없던 때라 사회지원도 바랄 수 없는 극도로 어려운 여건, 거기에 밥먹기도 힘들었던 극빈국에 속한 우리나라의 형편에서 오페라란 말도 몰랐던 당시, 여기에 이탈리아에 유학을 다녀 온 이인선 단장 외에는 출연자는 물론 연출자 조차도 모두 한 번도 오페라라는 것을 구경조차 해본 일이 없는 초심자들만이 모인 무대였기에 물론 실수난발의 뒷 이야기가 무성했기는 했으나 그래도 당시 서울 장안의 호기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던지 3개월 뒤인 그 해 4월에 재공연까지 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으나 이인선 단장은 빚더미에 올라 앉은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게 되는 국립오페라단이 창단된 것이 1962년이었는데 그 때까지는 주로 민간 오페라단 이를 테면 서울 오페라단(현재의 서울 오페라단이 아님) 한국오페라단, 프리마오페라단, 고려오페라단 등 6.25 전화의 폐허 속에서도 하겠다는 열성 하나로 등장했으나 운영난으로 한, 두 번 공연으로 대부분 문을 담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되는데 "공연 한 번에 집 한 채가 날아간다"는 당시 유행어처럼 험난한 오페라 운동을 이어왔는데 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척자적 열정과 사명감에서 오페라 운동에 헌신했던 선구자적 성악인들의 공이 크다고 하겠다. 오페라 운동은 1965년 전후에서 국립 오페라단에 맞서는 본격적인 민간 오페라단이 탄생함으로서 전환기를 마련하게 되는데 김자경 오페라단 (단장 김자경)을 비롯 서울 오페라단(단장 김봉임), 국제오페라단(단장 김진수), 베세토 오페라단(단장 강화자) 그밖에 수년 전까지만 해도 대구, 부산, 대전, 광주, 전주 등 지방까지 민간 오페라단이 30개가 넘어 왕성한 활동이 있었으나 이 근래 수 년 사이 오페라 무대를 보기 힘든 침체 상태를 이어 가고 있다. 금년 들어서도 한, 두 작품 그것도 소품을 조그마한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국립오페라단 (단장 정은숙)의 경우도 그렇지만 민간 오페라단 통틀어서도 제대로 된 무대구성이 전무 하다 시피 한 근래 보기 드믄 불황을 넘어 질식상태까지 이르고 있다. 이의 가장 큰 원인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페라 운동은 국력과 비례하고 일국의 정신문화와 비례한다는 시대성의 반영에 기인 한다. 비단 오페라 분야에 한한 일이 아니라 근래 음악계 전반에 걸쳐 부진을 면치 못한 상황이기에 하물며 막대한 재정지원을 필요로 하는 오페라에 대한 정치계나 정쟁 당국의 인식과 지원 대책이 미비한 원인이 큰데다 국내 경제계의 불황으로 인한 사회 지원도 미치지 못한 불리한 여건이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가뭄에 비를 기다리듯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순 없지 않겠는가. 6.25 전쟁 때 폐허 속에서도 오페라 운동을 이어온 선배 성악인들의 열정과 노력을 생각한다면 그 때보다는 사회 환경이 월등히 좋아진 오늘의 상황에서 성악인들이 힘을 합쳐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가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하리라 본다. 오페라계의 불황과는 대조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분야가 바로 뮤지컬이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단체들이 등장해서 많은 관객들을 끌어 모으며 연중무휴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 뮤지컬도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노래를 하며 연기를 하고 춤이 있고 물론 스토리도 있는 대본에 의해 무대구성이 된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때 성행했던 코메디풍의 가벼운 오페라의 일종인 오페레타(operetta),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코믹(opera comique)이라고 했지만 이 오페레타가 미국으로 유입되면서 20세기 초부터 이 형식을 미국인들의 취향에 맞게 대중적 음악극으로 꾸민 것이 이 뮤지컬이다. 따라서 뮤지컬의 원조는 오페레타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뮤지컬로 발전시킨 본고장은 미국 뉴욕의 극장가 브로드웨이이다. 이 뮤지컬이 우리나라에 정식 등장한 것은 한참 뒤인 1960년대 초가 된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공식적으로 처음 '뮤지컬'이란 말을 공언한 것도 필자다.묘한 인연이다. 5.16혁명 직후에 처음으로 정부조직에 생긴 중앙정보부가 '예그린악단'이란 연예단체를 만들어 직영하고 있었다. 성악인 합창단, 무용단, 교향악단 등 방대한 단체로 꾸며진 이 예그린악단이 하는 공연이란 무용단이 한복차림으로 나와 춤을 추며 옛 민요나 부르는 극히 안일한 무대 구성과 연출이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겼고 따라서 청중이 들지 않아 그 넓은 서울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의 전신)이 썰렁할 정도로 대부분 공석으로 끝나는 상태가 4회 공연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음악계 사정은 어려워 경비 마련도 못해 오페라 한 편도 무대에 올리질 못한 상황에서 막대한 국민 세금을 투입해서 마련한 무대가 기껏 학교 '학예회' 같은 무대구성 예술성은 고사하고 창의성이나 대중성도 갖추지 못해 관중들에 외면당하는 양상에 실망이 컸던 나는 마냥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어 충언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 사정은 혁명 직후의 계엄령 상태에 아직 군정을 펴고 있을 때였기에 그것도 국민들이 가장 두렵게 생각하고 있던 정보부를 상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각오를 하고 일간지(동아일보) 문화면 톱으로 "예그린악단에 바란다" 제하의 시사평을 쓰게 된다. 물론 공연방식이나 무대 구성에 비판을 가하고 바람직한 건설적 제안으로 현재의 공연방식에서 수준을 올려 '오페라단'으로 개편하든가 아니면 대중성을 지향한다는 방안을 검토했으면 좋겠다는 소견을 개진했다. 1962년 8월의 일이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뮤지컬'이란 말 자체도 없었고 하물며 국민들도 뮤지컬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시대다. 예상대로 신문이 나가자 바로 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는 했으나 이 사건으로 예그린악단은 4회 공연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그 이듬해 1963년 필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예그린악단은 뮤지컬 단체로 개편된어 문을 다시 열었는데 그 첫 공연으로 '시집가는 날'을 무대에 올리게 된다. 따라서 이 '시집가는 날'이 우리나라 뮤지컬 역사의 효시가 되고 예그린악단은 뮤지컬계의 선구자가 된다. 뮤지컬이 오늘날 현재와 같은 황금기를 맞이하리라곤 당시에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던 시대의 변천에 놀랄 뿐이다. 뮤지컬이 대중의 호응을 받고 호황을 지속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적 시각에서만 볼 필요는 없다. 그 나름대로 사회성을 갖는 한 분야로서 우리 사회에 대중문화로서의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침체에 빠져있는 오페라계에 다소라도 좋지 않는 영향을 미칠까 걱정이 될 따름이다.
뮤지컬은 오페라에 비해 대중성과 흥행성이 앞서고 오락성이 강하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이 접근하기 쉽고 또한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기도 용이하다. 이에 비해 오페라는 예술성은 앞서지만 대중성이나 오락성에서 뮤지컬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가볍고 즐기는 무대형식의 뮤지컬에 비해 인간 본질의 성찰과 인류사회의 고뇌와 범열 등 심각심각한 정신 내면의 추구 등이 주제가 되고 있는 오페라의 예술성 고양에 등한시 할 수는 없다. 특히 오페라는 그 나라 국력의 상징이자 문화의 척도로 삼는 오늘날 세계의 추세에서 오페라의 활성화는 국가 차원에서 필수적이며 정치계, 행정계, 국민 할 것 없이 발벗고 나서야 한다. 제아무리 국민 소득이 선진국 수준에 올랐다 해도 문화예술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문화가 고양되고 발전하지 않고서는 선진국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세계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들 특히 정치계와 정책당국은 깊이 인식해야 한다.
 




김형주
[기사입력일 : 2010-03-3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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