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일 : 2010-04-21 14:59]
정부는 애국가를 정식 국가로 입법 제정 공포해야
아직 국가(國歌)가 없는 나라 대한민국(제151호)


우리나라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지휘봉 하나로 세계를 누비며 풍운아적인 생애를 마친 선구자 고 안익태 선생의 부인 롤리타 안 여사가 금년 2월 16일 스페인 마요르카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는 1965년 안익태 선생이 주재해 오던 제4회 서울국제음악제의 주관을 위해 귀국했으나, 당시 국내 사정이 여의치 못해 음악제가 중단된 아쉬움을 안고 다시 출국, 지휘 초청을 받은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런던교향악단의 연습 지휘 도중 쓰러져 스페인 바르셀로나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1965년 9월 17일 59세로 생을 마친지 꼭 44년만의 일이다. 롤리타 안 여사는 1946년 안익태 선생과 결혼한 이후 어려운 가정살림을 맡아 3자매를 기르며 항시 연주여행으로 집을 비우기 일쑤인 남편을 존경과 사랑으로 뒷바라지 해왔고, 남편의 사후에도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긍지를 가지고 대한민국을 사랑했던 롤리타 안여사!. 그의 정성어린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안익태 선생이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세기를 풍미했던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국가(國歌)는 국기(國旗)와 더불어 독립 국가로서의 주권과 국민의 존엄을 상징하는 ‘나라의 노래’다. 따라서 국가는 한 나라의 국시(國是)는 물론 국가의 이념과 전통의 민족정신을 물론, 정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또한 지향하고 있는 것이 국가의 본질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세계적으로 이백 개가 넘는 독립국가가 있지만 모든 나라가 정부가 제정한 ‘국민의 노래’ 즉, 국가를 가지고 있다. 오직 우리나라만이 정식 국가가 아직 제정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48년 건국 이래,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애국가’를 국가를 대신해 불러오고 있다.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보다 넓은 세계로의 웅대한 꿈을 안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1930년. 당시 항공편이 없었던 시대이기에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천 기착지인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였다. 그 당시에는 ‘애국가’를 ‘이별의 노래’로 알려진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가락에 붙여 부르고 있었다. 안익태 선생은 당시 일제시대, 국내에서는 들어본 일도 없고 부를 수도 없었던 ‘애국가’를 자유롭게 부르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특히 가사 내용에 청년 안익태는 흥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특히 우리 ‘애국가’를 외국 민요가락을 빌려 부른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로 여긴 안익태 선생은 이 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애국가’는 자기가 작곡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게 된다. 안익태 선생은 ‘애국가’의 가사를 수첩에 적어 미국 유학 중 구상에 몰두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1936년 다시 독일로 건너가 당시 작곡가로 또한 지휘자로 독일을 대표하는 거장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에게 사사하면서 활동하고 있을 때 비로소 ‘애국가’의 작곡을 완성하게 된다. 이는 안익태 선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한국환상곡’의 후반부에 ‘애국가’ 합창을 편성하는 것과 맞물려 연관했기 때문에 이 ‘한국환상곡’이 완성됨으로 ‘애국가’도 완성된 것이다. 안익태 선생은 ‘애국가’의 악보를 정사해서 미국샌프란시스코 대한국민회에 보냈고 이는 다시 한인교회를 통해 미국 내 한인 교포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대한국민회는 ‘애국가’를 대량으로 인쇄해서 중국 상해(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 중국 내 독립국들에게 보내져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국내에서는 여전히 ‘올드 랭 사인’의 가락에 맞추어 부르고 있었고 임시정부를 비롯, 독립 투쟁하던 해외 단체들이 귀국하면서 국내에도 알려져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과 동시에 ‘애국가’ 가 국가처럼 공식화된 것이다.
 ‘애국가’는 국민의 노래이기에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임의로 부를 수 있고 어느 때나 어디서나 자유롭게 부르고 항시 애창하는 노래가 되어야 하고 또한 그렇게 권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2006년에 ‘애국가’에 대한 저작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예술의 창작물이 그러하듯이 음악도 작곡을 하게 되면 저작권이 발생하고 그 저작권은 작곡자가 소유하게 된다. 이는 지적 재산권 보호차원에서 저작권법이 입법 제정되어 저작권을 보호하게 되어있다. 따라서 누구나 저작물, 즉 음악을 사용하고자 할 경우 저작자에게 일정한 사용료를 지불하고 승인을 얻어 사용하게 되어있다. 이 저작권을 신탁계약이란 약정에 의해 저작자를 대신해서 관리업무를 맡고 있는 단체가 바로 사단법인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이다. ‘애국가’는 안익태 선생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본인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부인인 롤리타 여사가 승계해서 1992년부터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의 신탁계약을 통해 ‘애국가’의 저작권을 행사해 오고 있었다. 교육, 종교, 또는 공공기관이나 단체의 비영리 목적이나 행사 등을 제외한 어느 특정인이나 영리업체, 또는 이익단체의 영리목적의 사용, 그리고 방송이나 프로스포츠 경기 등 그간 ‘애국가’의 저작권 사용료로 매년 약 500만원에서 800만원정도를 지불해 오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애국가’ 의 저작권 문제가 당시 새삼스럽게 제기된 것은 인터넷을 통한 네티즌들의 반발이 커졌기 때문이다.
 저작권법에는 저작권자의 승인없이 무단으로 ‘애국가’를 테이프로 제작해서 배포하는 행위나 MP3파일로 만들어 온라인상에 올리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법으로 금하고 있다. 또한, 인터넷으로 무단 전송하거나 받는 행위도 불법이다. 그러나 ‘애국가’에 대한 네티즌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의 정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우리 ‘애국가’를 일일이 돈을 내면서 불러야 하느냐??,??단순히 ‘애국가’를 전송하는 것도 죄가 된다니 말이 되느냐??, ??세계 어느 s라에 국가를 부르는 데 돈을 내는 나라가 있느냐?? 하는 등. 불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물론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우유부단했던 당시 정부 당국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이러한 문제를 예측한 문화관광부가 그 전에 즉 2003년에 주무부인 행정자치부에 ‘애국가’의 저작권 영구 사용권을 구입할 것을 요청한 바 있었으나 당시 행자부는 ‘애국가’를 돈으로 사는 행위 자체를 국민들이 받아들이겠느냐는 국민정서를 감안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국내에서 논란이 일자 롤리타 여사를 비롯한 유족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마음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던 것으로 전해지면서 ??애국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것이니 국민 여러분이 결정해주기 바란다. 국가 헌납을 비롯 어떠한 결정에도 기꺼이 따르겠다.??라고 입장을 밝혀 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배경도 ??대한민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당연하다는 듯 간단명료하게 답을 보내왔다. 그렇다면 결정은 국민의 몫이다. 처리방안은 여러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바람직한 방안은 유족으로 하여금 ‘애국가’를 국가에 헌납하게 하고 정부는 ‘애국가’를 국가로 정식 입법 제정하는 절차를 밟는 방식이 이상적이다. 2006년 다행히도 롤리타 여사를 비롯한 유족들이 경기도의 행사에 초청을 받는 기회가 마련되어 고국을 방문(3월 14일부터 20일까지)하게 되었고, 3월 16일 롤리타 여사는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정부에 아무 조건없이 ‘애국가’를 헌납하겠다는 기증서를 전달했다. 우리는 그 뜻을 기리며 겸하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2009년 현재까지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정책과제로는 첫째, ‘애국가’를 ‘국가(國歌)’제정에 관한 법‘을 통해 정식 국가로 제정, 선포하는 일, 둘째, 고 롤리타 여사의 유해를 본인의 소원대로 현재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안익태 선생(1977년 7월 8일 스페인에서 이장) 곁으로 이장, 합장하는 일, 셋째, 안익태 선생의 유물을 보존하고 업적을 기리기 위한 ’안익태기념관’ 건립사업을 추진하는 일, 넷째는 안익태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는 일 등이다.
 일제 치하에 ‘한국’이란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고 ‘한국’이란 나라 이름 자체를 몰랐던 시대에 지휘봉 하나로 세계를 누비며 지휘활동을 하면서 자기는 일본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고 떳떳하게 밝히고, 어느 나라에 가나 꼭 연주곡목에 편성하는 우리 민족사를 서사시로 음악화한 안익태 선생의 대표작 ‘한국 환상곡’의 끝부분에 나오는 ‘애국가’의 합창을 그 나라말로 번역해서 부르게 하자는 매니저와 싸우면서까지 꼭 우리말 발음으로 부르게 한 고집스런 의지의 애국심, 이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어 약소국가의 긍지와 독립정신을 세계에 알린 애국자 안익태 선생! 어느 독립투사 못지않은 안익태 선생의 조국애와 공적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럼에도 스페인 마요르카에 있는 안익태 선생이 거주했던 가옥을 사들인 교포가 ‘안익태기념관’ 조성을 위해 정부에 기증했음에도, 그리고 운영예산까지 편성해 놓고도 이를 무산시킨 정부의 무성의를 언제까지 탓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음악계, 그리고 국민이 모두 협력해서 추진하는 것만이 안익태 선생과 그 유족들의 고귀한 애국심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된다.(2009년 4월 8일자)


 




김형주
[기사입력일 : 2010-04-2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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