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일 : 2014-08-26 16:10]
이주은의 <음악의 모든 것-29>



유럽 음악여행기 Ⅲ : 체코 프라하에 가다.

비엔나에서 프라하까지는 기차보다 버스가 좀 더 저렴하므로 버스로 이동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버스로 이동할 시에는 5시간 정도 소요되고 3만원 조금 안 되는 요금을 지불하면 된다. 버스는 기차보다 좀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전혀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편하게 여행을 즐겼다. 비엔나에서 미리 사둔 간식을 맛있게 먹으며 친구와 얘기도 나누고 음악도 듣다가 잠시 잠들었는데 두 세 시간 지났으려나... 밖을 보니 간판마다 글씨가 달라져 있었다. 독일어에서 두세 시간 만에 체코어로 변해 있었으며 잠시 쉬었다가 간다고 내리라고 한다. 스튜던트 에이전시 휴게실이 별도로 있어서 불편함은 없었다. 그렇게 하여 다섯 시간 만에 프라하역에 도착하였다. 이어지는 여행은 전철로 가도 되겠지만 짐꾸러미가 많아서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여행 블로그를 보면 모두가 안델스호텔을 추천하여 그곳으로 예약했는데.. 어머나! 내가 5년 전에 묵었던 그곳이 아닌가? 위치도 좋고, 식사도 맛있고, 시설도 꽤나 잘돼있는 커다란 호텔이다. 프라하는 생각보다 크지 않기 때문에 며칠이면 다 볼 수 있다. 물론, 구석구석 제대로 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의 목표는 까를교 연주 감상과 거리공연, 그리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다녀갔다는 유명한 재즈클럽에 가는 것이었다. 음악의 도시답게 길거리에는 온통 연주로 가득하다. 까를교 연주와 거리공연은 봤는데 그 재즈클럽 위치를 몰라 검색해서 클럽에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는다. 구글 지도 앱을 켜서 무작정 찾아보기로 했다. 그 어두운 밤에 구글지도만 믿고 골목골목을 누빈 지 20분 만에 ‘REDUTA JAZZ CLUB'이 눈앞에 나타났다. 너무나 설레기도 하고 신나하면서 입장. 오후 9시부터 정규공연이 진행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기타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숨죽이며 음악에 푹 빠진 관객들의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9시 정규 밴드공연이 시작되면서 정말 신나고 가슴 뛰는 무대가 펼쳐져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정말이지 음악의 힘이란 게 이렇게 위대한 지 새롭게 맛보는 순간이었다. 프라하에 간다면 이 재즈클럽에 꼭 한번 찾아보길 바란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구글 앱은 필수) 그럼 이쯤에서 체코의 음악가들은 누가 있는지에 대해 한번 알아보도록 하자.

 

체코의 음악가

스메타나(Bedrich Smetanan, 1824~1884)

체코 근대음악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작곡가이다. 맥주 제조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1839년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홀로 프라하로 나왔다가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큰 감명을 받는다. 고등학교는 시골에서 마친 후 프라하로 돌아가 음악 가정교사를 하면서 요제프 프로크슈에게 음악이론과 작곡법을 배웠다.

프라하에도 자유주의 혁명의 영향이 밀어닥친 1848년 스메타나는 혁명군을 위해 행진곡이나 자유의 노래를 작곡하고, 그 해 리스트의 원조를 받아 프라하에 음악학교를 설립했다. 1856년 스웨덴의 항구도시 예테보리시 필하모니의 지휘자로 초청받아 5년 동안 스웨덴에 머물렀다. 1859년 체코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가 프랑스 나폴레옹 3세와의 전쟁에서 패전하여 영내의 여러 민족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면서 체코 민족운동이 활발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1861년 프라하로 돌아가서 독립 운동의 음악적 대변인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크인〉,〈달리보르〉같은 독립운동을 고취한 애국적인 오페라와 체코 농촌의 모습을 묘사한〈팔려간 신부〉등을 속속 작곡했다. 1874년 여름, 그는 난청의 징후와 정치 세력에 대한 격심한 반감으로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시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작곡에만 열중했다. 1881년 국민극장 낙성식에서 체코의 건국 신화를 오페라화한 〈리부셰〉가 초연되었으나 작곡가 자신은 완전히 청각 기능을 상실해 그 연주를 들을 수 없었다. 3년 후 발광하여 프라하의 정신병원에서 일생을 마쳤다.

 

*드보르작(Antonin Dvo?ák, 1841~1904)

프라하 근교에서 여관과 푸줏간을 경영하는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찍부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나 부친은 맏아들에게 가업을 계승시킬 생각으로 12세 때 경영 업무에 필요한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해 가까운 소도시 로즈니스에 보냈다. 그곳에서 독일어 교사이며 오르가니스트인 안토닌리만에게 음악이론과 피아노 연주법을 배웠다.

리만의 덕택으로 프라하로 나와 오르간 학교에서 음악을 배우고, 카렐콤차크 악단에 들어가 비올라주자로서 레스토랑 등에서 연주를 했다. 1859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하자 체코 민족운동이 활발해졌고, 체코의 국민음악을 위한 가설극장이 열렸으며 합창단체인 흘라홀이 설립되었다. 이때 체코 가설극장 관현악단에 들어간 드보르작은 1862년부터 1871년까지 10년 간 비올라를 담당했다. 1866년에는 스메타나가 지휘자로 부임해 와 체코 국민음악을 일으키려는 그의 영향을 받게 된다.

1873년 민족적인 제재를 다룬 〈빌라 호라의 후계자들〉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후 가설극장을 사임하고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면서 체코의 종주국인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젊고 가난하고 재능이 있는 예술가’에게 주는 국가 보조기금에 응모해 1875년부터 5년 동안 해마다 작품을 제출하여 400굴덴이라는 거액을 받게 되었다. 특히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브람스가 드보르작을 높이 평가했고 이후 그의 명성이 국내외적으로 높아지면서 젊은 야나첵도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884년부터 1896년까지 아홉 차례에 걸친 영국 방문에서도 헨델 이후 처음이라는 대환영을 받았고 케임브리지 대학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1890년 러시아 방문에서는 차이코프스키와도 교류하게 된다. 1892년 뉴욕에 신설된 내셔널 음악원의 창립자 지닛 서버 여사의 초청으로 도미하여 1895년 4월까지 그곳 원장 및 작곡 교수로서 업적을 남겼다. 이때 교향곡 9번〈신세계로부터〉나 첼로협주곡 등 걸작을 낳았으며 미국에 머무는 동안 흑인 학생들과 사귀면서 흑인 영가나 아메리칸 인디언의 음악에 공감을 느꼈다.

1895년 귀국하여 프라하 음악원 작곡 교수가 되었고 1901년에는 오스트리아 종신 상원의원으로 추대되었으며 1904년 5월 1일 신장병으로 급서했다.

 

*야나첵(Leos Janacek, 1854~1928)

체코 모라비아 지방이 낳은 최고의 작곡가이다. 가난한 벽촌 초등학교 교사의 열 번째 아들로 태어나 모라비아의 중심 도시 브루노의 성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 부속학교에 다니면서 성가대에 들어갔다. 1869년 15세 때 브루노의 사범학교로 진학했고 1872년에 졸업 후 모교의 교사가 되었다. 1876년에서 1888년까지 브루노 클럽의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하면서, 그 사이 프라하 오르간 학교, 라이프치히 음악원, 빈 음악원의 여름 학기에 단기간씩 유학했다. 1881년 창립된 브루노 오르간 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1919년에는 브루노 오르간 학교와 부르노 클럽의 음악학교를 통합해 프라하 음악원 브루노 분교를 발족시켰으며 1920~1925년 마스터클럽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그는 평생 브루노에 머무르며 별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60대 중반 이후 비로소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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