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일 : 2017-01-04 17:22]
<음악의 모든 것 - 58- > ‘쇼팽’과 ‘슈만’ 그리고 ‘달리’ 뮤즈



쇼팽에겐 오랜 연인인 상드가 있었고 슈만에게는 아내 클라라 슈만이,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게는 아내 엘뤼아르 갈라가 있었다. 이번호에서는 그들의 뮤즈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쇼팽과 상드】1810년 3월 1일생인 프레데릭 쇼팽은 폴란드가 낳은 최고의 작곡가로 그는 주로 파리에서 머물었으며 39년이란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피아노 작품을 남긴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고 있다. 천재작곡가였던 쇼팽은 사교계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1836년, 6살이나 연상이었던 조르주 상드를 프란츠 리스트의 집에서 만나게 되는데 리스트의 연인인‘마리 다구’백작부인의 살롱에서였다. 남장에다 시가를 피우는 유명 여성작가였던 조르주 상드를 처음 본 쇼팽은 "오만하고 뻔뻔스런 남자 같다."라고 말했지만 조르주 상드는 쇼팽을 보고는"귀여운 소년 같다."라며 요염한 눈길을 보냈다. 그러한 만남이 무려 9년 동안 지속되더니 결국은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런 시기에 쇼팽은 여러 가지 영감을 얻어 훌륭한 작곡을 펼쳐나갔으며 상드 역시 쇼팽으로부터 얻은 영감으로 많은 작품들을 쏟아낸다. 쇼팽의 경우엔 이 시기가 절정기라고 말할 정도로 상드가 미친 영향력은 가히 최고였다. 두 사람은 1838년 가을, 스페인 마요르카 섬으로 가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상드의 두 아이들인 모리스와 솔랑즈도 함께였다. 하지만 마요르카에서의 생활이 오래 가지는 못했는데 상드와 쇼팽의 관계를 의심한 동네 사람들의 비난과 구박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우기가 닥쳐 평소 몸이 약했던 쇼팽은 건강을 크게 상하고 말았다. 아마도 폐병으로 추정되는데 쇼팽은 이때 각혈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받아주는 곳이 없어 발데모사 수도원에서 지냈다. 상드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자 할 수 없이 마요르카 섬을 떠났다. 마르세이유에서 잠시 요양을 한 뒤 자신의 고향인 프랑스 중부의 노앙(Nohant)으로 쇼팽과 아이들을 데리고 갔고 이때부터 1846년까지 쇼팽과 상드는 노앙과 파리를 오가며 지낸다. 특히 노앙에서의 삶은 쇼팽에게 매우 행복한 시기였는데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그는 기질적으로 예민한데다 신체적 질병까지 얻었지만 상드의 모성애적 사랑은 큰 위로가 되었다. 상드는 쇼팽에게 행복과 영감을 줬던 어머니 같은 연인이었고 예술의 뮤즈였다. 쇼팽이 작곡한 <강아지 왈츠>는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데 이 작품은 조르주 상드와 사랑을 하면서 작곡한 것이었다. 조르주 상드가 키우던 강아지가 있었는데 그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자기 꼬리를 잡으려고 빙글빙글 계속 도는 모습을 지켜본 쇼팽이 영감을 얻어 작곡했던 곡이 바로 강아지 왈츠였던 것이다. 이 작품은 1846년과 1847년 사이에 작곡되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시기가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사랑이 막바지에 달했던 시기로 쇼팽의 건강이 악화된 때이기도 했다. 1847년 7월 28일, 조르주 상드는 쇼팽에게 결별의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10년도 안된 연인관계는 파국을 맞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의 대표적인 명곡으로 일컬어지는 <강아지 왈츠>는 강아지처럼 굉장히 경쾌하며 활발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쇼팽이 처한 상황들에 비추어 본다면 전혀 반대되는 분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쇼팽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그의 다사다난했던 연애사답게 실연의 상처를 많이 풍기고 있어 간절하면서도 애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그의 조국이었던 폴란드의 비극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상드와의 이별은 쇼팽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죽기 전까지 여러 차례 상드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사랑을 간곡하게 호소하는 편지도 보내보았지만 변심한 연인의 마음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으며 끝없는 고독 속에서도 작곡과 연주활동에만 매달렸고 이로 인해 건강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1849년 10월 17일, 39세란 나이로 결국 생을 마감한다. 상드와 헤어진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의 라세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는 모차르트의‘레퀴엠’이 연주되었으며 고향 바르샤바의 흙 한주먹이 그의 몸 위로 뿌려졌다.

 

【슈만과 클라라】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을 이끈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작품도 인생도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클라라 비크는 슈만보다 9살 연하였

지만 당시 슈만조차도 올려다보기 힘들 정도로 명성을 쌓은 피아노 연주자였다. 클라라는 그야말로 19세기 유럽에서 전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유명한 직업연주가로서의 재능과 경력을 골고루 갖춘 여인이었다. 5세 무렵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의 엄격한 훈육을 받으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혹독한 연습 끝에 신동이라는 평가까지 받았으며 9세에 프로 연주가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데뷔하였다. 이후 유럽 여기저기를 순회하며 뛰어난 연주실력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슈만은 비록 작곡과 평론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불투명한 미래를 가진 노총각일 뿐이었다. 그의 스승이자 클라라의 아버지인 비크는 슈만의 첫사랑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었고 거기에다 딸이 연주여행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에도 상당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당연히 거센 반대에 부딪혔지만 클라라가 완강히 저항하자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벌어들인 돈을 모두 신용관리할 것이라며 슈만과 결혼한다면 그 돈은 한 푼도 내줄 수 없다고 압박해왔다. 혹독하고 엄한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없이 자란 클라라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찰나에 여리지만 다정다감했던 슈만은 그녀에게 탈출구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슈만은 자신을 믿고 의지해오는 클라라를 위해 물러서지 않을 태세로 아버지를 설득했지만 비크는 완강하기만 했다. 결국 슈만과 클라라는 법정을 통해 결혼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냈고 마침내는 이겨 1840년 정식부부가 되었다. 이 해는 슈만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해로 훗날 평론가들이 '가곡의 해'라고 부를 정도로 183곡이나 되는 많은 곡들이 작곡되었다. 모든 가곡 속에는 클라라에 대한 사랑이 녹아있었다. 결혼 이듬해인 1841년에는 교향곡, 협주곡, 실내곡 등이 작곡되었고 모두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클라라는 슈만에게 있어서 뮤즈와도 같은 존재였다. 반면 결혼으로 인해 클라라는 자신의 연주인생을 상당부분 접어야만 했다. 결혼에 골인하기 위해 험난한 일정을 소화했던 슈만은 심신이 지쳤고 그래서 슈만은 클라라를 언제나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게다가 슈만은 클라라의 명성을 어느 정도는 질투했던 것 같다. 그것은 클라라가 슈만이 뒤셀도르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기 전까지 자신만의 연습실을 가질 수 없어 피아노 연습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일화에서 드러난다. 슈만은 언제나 자신이 클라라보다 못하다고 느꼈고 그로 인해 정신적인 고충이 있었다고 한다. 사랑하면서 질투하는 복잡한 감정 속에서 슈만은 집안 내력인 정신신경 계통의 병이 발병한다. 정신적으로 조울증에 시달리면서 슈만은 아내 클라라의 연주여행에 동행하기도 하고, 클라라를 위해 피아노곡을 지었으며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으로 클라라와 협연하여 지휘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음악신보>를 통해 많은 음악평론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의 많은 평론 중 가장 주목받는 것은 당시 무명의 신예 작곡가였던 브람스를 소개하고 그에게 미래를 열어준 것이다. 슈만의 집을 찾은 브람스는 그날 이후 슈만을 스승으로 여기며 우정을 나누었지만 이후 브람스는 클라라를 사랑하게 된다. 이 무렵 슈만은 정서적으로도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맡고 있었던 오케스트라단과의 갈등도 그의 심신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1853년 슈만은 망상에 사로잡혀 라인강에 투신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지나가는 어부에게 구출되어 목숨은 건졌지만 정신적으로 이미 회복불능 상태에 놓인 그는 본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지 2년 뒤에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 혼미한 상태에서 폐렴까지 도져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클라라가 면회 갔을 때에는 음식을 삼키는 것도 힘들어 해 와인을 손가락에 찍어먹게 하던 클라라를 껴안고 '나도 알아(Ich weiß)'라고 한 말이 유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달리와 갈라】음악가는 아니지만 화가였던 달리의 이야기가 너무 강렬해서 그의 연인인 갈라와 함께 언급하려 한다. 1904년 5월 11일생인 살바도르 달리는 스페인에서 태어난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다. 달리의 인생은 그의 뮤즈 갈라를 만나고부터 인생의 전후가 확 바뀌어버린다. 천재화가로 뛰어난 재능과 외모를 가진 달리였지만 뭐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순수하고 여리기만 한 남성에게 갈라는 달리의 모든 것이 되어준다. 달리가 20대에 갈라를 만났지만 갈라는 그보다 10살이나 많은 연상의 유부녀였다. 달리와 갈라는 사랑을 키우다가 드디어 1934년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 달리는 빠르게 변화했으며 그의 두서없는 작업은 작품이 되어서 상품성을 지니게 되었다. 갈라는 달리의 천재성을 알아채고 그를 뉴욕에까지 데려가 화려한 사교계에 진출시킨다. 화려하고도 여성편력이 심했던 달리의 영혼을 온전히 사로잡은 건 어느 누구도 아닌 갈라였다. 세월이 흘러 갈라가 늙어죽게 되자, 달리는 갈라가 살던 집으로 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갈라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혼자 외로이 살다가 집에 불이 나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마치 예정되어 있듯 달리 또한 갈라 곁으로 떠나고 만다. 갈라 없이는 달리의 예술도, 인생도, 화려함도, 여성도 아무 의미 없는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뿐이었다. 필자가 지난 7월‘샤갈 달리 뷔페’전시회에서 달리의 글을 보고는 한참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너무 가슴에 확 닿는 글귀였다. 정말 열정적으로 온 맘을 다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가!‘내 어머니보다, 내 아버지보다, 피카소보다 그리고 심지어 돈보다도 갈라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뮤즈이자, 천재이자 나의 삶이다.’음악이 되었든 미술이 되었든 간에 예술에 있어서 그 옆 자리에 누가 있느냐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어디 예술뿐이겠는가! 우리들 삶에 있어서 생사고락을 함께 누릴 동반자는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자리다.

 






[기사입력일 : 2017-01-04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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