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일 : 2019-03-21 16:56]
피아니스트 조가람의 클래식 에세이 - 2



[기술은 언제 예술로 올라서는가]

 

“Technique level :Asian”

 

건반 위를 종횡무진하는, 그리고 세계무대를 종횡무진하는 피아니스트 Yuja Wang의 영상에는 한바탕 아고라 광장이 열렸다. “Technique Level: Asian “이라는 댓글에 논쟁이 벌어진 것. 나는 아시안이지만 이와 같이 연주하지 못한다는 아시안 피아니스트의 댓글에 이어, 그녀의 Skill Level Asian이 아니라 Yuja Wang이라는 댓글, 그에 반박하며 왜 아시안 음악가들은 테크닉을 자랑하고 싶어하느냐는 댓글, 급기야 아시안 음악가들은 ‘Asian Parent’가 만들어낸 로봇이라는 댓글도 보였다. 새로운 일도 아니다. Asian Technique Level은 이미 유러피안 음악가들 사이에 횡행하던 우스갯소리. 공개 심사를 하는 독일의 입시 시험 현장에서도 손이 빠르며 한치의 실수나 흔들림도 없는 아시안 음악가가 나타나면 심사위원끼리 눈을 마주치며아시안이라고 대화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다. 국제 콩쿠르의 쉬는 시간, 청중석에서는 오랜 세월동안 클래식 음악을 들어 온 수준급의 매니아들의 열띤 토론이 한창이다. 역시 등장하는 ‘He is totally an Asian.’ 그 옆에 앉은 까만 머리의 동양인인 내게 물어온다. ‘,어떻게 아시안 음악가들은 테크닉이 완벽합니까’. 이를 물어오는 이들은 두 부류다. 기술적 완벽함에 대한 조소, 혹은 경탄. 나는 이 두 부류의 입장을 모두 이해한다. 나 또한 아시안의 틈없고 흠없는 기술에 때로 허무함을 느끼기도, 감복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것이 강박일 때

우연히 어떤 음악을 듣는다. 그 음악에 매료된다. 악보를 주문하고 설레임으로 기다린다. 악보가 손에 들어왔다. 종이 냄새를 한 번 맡고 빠른 걸음으로 연습실로 향한다.

더듬거리며 알아간다. 친구를 사귀듯이. 유연하게 흘러가는 부분이 있고, 익숙해지는데에 의지와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순탄히 흘러가다 급작스러운 낭떠러지를, 소용돌이를 마주치기도 한다. 그 소용돌이를 나의 은사님께서는 피가 날 정도로 어려운 부분-이름하여 “Die Blutstelle”라고 부르셨다.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고 넘어서지 못할 산맥같은 기술적 난관에 봉착할 때면 때로 심미적 가치를 잠시 뒤로 한 채 우선 기술의 완성에만 몰두하기도 한다.

기술적 완벽함에 대한 강박. 때로 이 난관은 곡 전반에 걸쳐 드리워지기도 하는데 이 때 잠시 뒤로 했던 심미적 가치-, 우리가 이 음악에 매료되었던 순간은 간 데 없이 잊혀진다. 그리고 기술은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전도된다.

기술은 어느 새 강박이 되었다.

 

헤어나와야 한다.소용돌이로부터.

소용돌이같은 기술적 난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음악은 그 곳에 갇힌다. 기술은 예술로 올라서지 못한다. 뒤로 했던 그 자리에 둔 채 잊으면 기술의 완성이 곧 음악의 목표가 되고, 그 음악의 가치는 기술의 완벽함에 묶이게 되는 것. 이 곳에서 멈춘다면 앞서 언급한 ‘Asian Music’에 그치게 된다. 애써 백겹의 인내와 인고의 시간,영특함과 총기로 일궈 낸 기술을 조소거리로 전락시키는 안타까운 음악이 탄생하는 것이다. 어떻게 헤어나올 것인가.

 

우선순위를 켜두는 것

곡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항시 가슴과 머리의 중심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이 곡에 매료된 순간이다. 우리 나라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그 순간을 잊기 쉬운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본인이 느꼈던 매혹을 무대에서 만끽할 수 있는 경험보다 평가받는 무대의 기회가 훨씬 많은 이 상황에서 당연히 학생들은 기대감이나 설레임이 아닌, 실수에 대한 두려움과 실패에 대한 방어기제를 쌓으며 무대를 준비한다. 기술에 대한 공포 혹은 승리감이 음악의 매혹을 압도하지 않도록 우리는 궁극적인 목적지를 잊으면 안된다. 당장 닥친 시험과 콩쿠르는 잠시 잊고 매료되었던 순간을 떠올려보자.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곡에 빠져들었으며,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 당신을 음악으로 이끈 주춧돌 같은 곡이 있다면 그것을 다시 들어보는 것도 사랑을 회복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나는 이럴 때 Gustav Mahler Symphony No.36th movement,’사랑이 내게 말하는 것Leonard BernsteinVienna Philharmonic Orchestra의 연주로 듣곤 한다. 아무리 조급하고 두려운 순간에도 내가 놓지 말아야 할 음악인으로서의 본질. 그 어떠한 종류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다시금 가슴이 벅차오른다.

매혹은 여행과 같은 음악의 완성 여정에서 가야할 방향을 제시한다. 사막 속의 별처럼, 어두운 바다의 등대처럼,그 순간을 가슴에 두고 불을 켜 두면, 우리는 여정의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고개만 들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다. ,방향이 정해졌다.

 

기술이 예술로 올라서려면.

 

이제는 여행 길의 매 순간과 장면을 누려야 한다. 정경교융의 찰나는 차곡히 쌓여 하나의 여행기가 될 것이다. 내가 경이 되고, 경이 정이 되어 물아일체를 이루는 이 여행에는 용기와 신뢰가 필요하다. 무용할 용기와 음악에 대한 신뢰가.

-무용할 용기

연주할 곡의 앞 2~3분에 자신의 역량을 모두 증명해야 하는 우리 나라 콩쿠르와 실기시험 시스템은 우리에게일초도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매순간을 빽빽히 뛰어남으로 채워 당신의 유용함을 보여주세요.’라고 요구한다. 달리며 음표를 정복해가는 스포츠 경기같은 연주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콩쿠르를 통하지 않고 연주자로 설 수 없는 이 시대의 음악계는 평준화된 취향과 시장의 독점화의 탓도 있으며, 이에 항변할 용기가 없는 우리 음악가들의 책임도 있다. 나 또한 콩쿠르에 참가할 때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매 순간을 증명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으로 참가 한 국제 콩쿨.꽤 의욕적으로 준비하다보니 정작 체력 싸움이라고 까지 이야기하는 콩쿨 기간동안 지독한 감기 몸살에 시달렸다. 깡으로 버티며 Semi Final Round까지 의욕만큼 무대에서 나의 최고치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했건만,막상 Final Round에서는 체력적 한계에 부딪혀 본의아니게 힘을 빼고, 음악이 이끄는대로 뒤따라 갈 수 밖에 없었던 것. 아마도 그 날의 나의 연주는 평소보다 덜 달려가고 덜 정복하고 덜 이겼을 것이다. 오늘은 이기지 못하겠다, 내 뛰어남을 증명할 수 없다면 음악으로 얘기하자.라고 생각하고 무대에 섰으니 말이다. 무대에서의 기분은,매우 사적인 느낌 그리고 묘한 평안함이 공존했다. 연주 후 피드백은 놀라웠다. 많은 청중들이 나의 사적인 연주를 자신의 이야기로 느끼고 눈물지었다. 바로 연주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준 셈이 된 것.한 오스트리아인 심사위원은 내게 다가와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세미 파이널의 당신이 ㅇㅇ화려한 젊음이었다면 오늘의 당신은 하나의 우주였다라고 평했다. 용기를 내어이기려는증명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도리어 참 음악을 전달할 수 있다. 작곡가가 기록해 놓은 이야기의 조각들에는 화려함과 고결함,온전함과 완벽한 아름다움만이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엉성함과 상스러움,허무와 정적,촌스러움과 난잡함, 멈춤과 빈곤의 순간마저 존재의 역할을 할 때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이룬다. 이 때 연주자는 명성과 승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음악의 영혼을 지켜야 한다.연주자가 음악의 전개대로, 음악이 원할 때에는 열과 성을 다할 뿐 아니라, 때로는 머무름과 물러섬으로 스스로 무용할 용기를 내면, 역설적으로 기술은 예술로 올라선다.

 

-음악에 대한 신뢰

 

음악이 그 자체로 온전함을 신뢰하지 못하면 연주자는 무언가를 더 강하고 크게 표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확하게 알맞은 감정의 과녁을 관통하는 소리가 존재한다. 그 치밀한 현존을 세상에 있는 그대로 끌어내는 것. 그것이 우리 연주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 곳에는 신중함은 필요하되, 음악만으로 충분치 않으리라는, 자신이 더 드러나야 한다는, 그래야 청중이 이해하리라는 불신과 두려움은 의미가 없다. 음악 본연의 힘을 믿어보자. 많은 것을 더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장식하지 않아도 음악이 그 자체로 온건함을 믿어보자. 연주자 자신만의 향은 그 온건함을 재현하는 억겁의 연습 과정에서 자연스레 베어들어 은은히 퍼지게 될 터이니.

 

그리고 늘 잊지말아야 할 -여백

! 여백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한다. 이 바쁘고 급한 도시속에서 사는 세대의 음악가들이 음악 속에서 여백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쩌면 연금술에 가까운 허상일지도 모르겠다. 여백의 미는 분명 동양의 것이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시대의 흐름이 바뀌며 우리는 서양보다 급한 삶을 살게 되었다.아시안 음악가들이 바삐 앞으로,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당연할지도. 멈추어야 발견할 수 있는 여백의 미가 존재한다.그것을 경험한 자는 또 다시 그 아름다움을 찾게 된다.그 여백을 화가 마르쉘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은 앵프라맹스(Inframince)라고 불렀다.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랑을 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주고 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그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아무리 다가서도 얇은 빈틈이 생깁니다. . . . 어쩔 수 없이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틈새를 발견하고 안타까워하지요. 애타는 절망이 또다시 남에게 다가서려는 욕망을 일으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정이라고 부르고 그리움이라고도 합니다. 보이고 잡히는데도 아주 얇은 앵프라맹스가 그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찢을 수도 녹일 수도 없는 것이지요.”

-이어령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 틈새는 음악안에서 프레이즈와 프레이즈 사이, 소리와 소리 사이, 연주자와 작품의 사이, 연주자와 청중의 사이에도 존재한다. 이를 우리가 찢을 수도, 녹일 수도 없고 함께 가야하는 운명이라면 우리는 그 앵프라맹스를 잘 운용하는 수밖에. 잘 더불어 사는 수밖에. 덤으로 기술 너머 예술의 길에 들어서는 영광을 입게 될지도 모르니.

 

 





[기사입력일 : 2019-03-21 16:56]
업계소식 한국팬플룻오카리나 강사협회 행사(공연)
상호 : 시사음악신문 / 대표 : 조오정 / 사업자 등록번호 : 105-08-69218 / 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127 (공덕동 풍림 VIP빌딩 1102호)
TEL : 02-706-5653 / FAX : 02-706-5655 / Email : cho5jung@hanmail.net
copyright(c) 2013 시사음악신문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