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일 : 2020-02-24 16:24]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부를 마땅한 노래가 없다!



특별기고

 

 

기고자: 조홍기 회장(한국코다이협회)

 

동요, 가요, 가곡, CCM, K-pop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가 있기는 하지만 온 나라 어른과 어린이들이 함께 부를 마땅한 노래가 없고 같이 부를 기회가 더더욱 없는 현실이다. 전에는 학교 조회 시나 국경일, 졸업식 등에서 합창으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었다. 그 이전 만해도 어른은 민요를, 어린이는 전래동요를 불렀고 개화기에 와서는 찬송가나 새로 작곡된 가곡, 근대 가요, 동요 등이 불렸고 6~70년대 만해도 포크송, 캠프송 등이 모든 사람의 입에서 불려졌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함께 부를만한 노래가 딱히 없는 것 같다.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책에서 스티븐 미슨 (Steven Mithen)은 인간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음악에 대한 본능으로 인해 음악은 삶 속에 늘 함께 했다는 것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고 인간은 얼마나 음악적인가를 쓴 존 블레킹도 음악적 구조는 인간 삶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구조적 원리를 가지고 있어서 늘 음악과 노래가 함께 한다고 말했다. 둘 다 음악가가 아닌 고고학자나 인류학자 입장에서 인간과 음악과의 관계를 논하였지만 음악이 인간에게 중요하다는 공통점과 특히 노래는 원시적일수록, 본능적일수록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음악이 본능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함께 불리는 노래들은 인간의 심연을 자극하고 사회성과 정체성을 느끼게 하는 좋은 도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함께 불려야 할 노래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세분화되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분열되고 분산되어 제각각의 소리만 내고 있다는 것으로 요즈음의 사회현상 그대로를 반영하는 것이다. 예전의 학교 교과서에는 단원마다 제재곡이 있었고 그 노래를 바탕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요즘 교과서에는 노래가 없다. 한때는 우리 국악이 강조되어 교과서의 반 정도 차지할 때도 있었는데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했던 전래동요나 민요들이 등장하여 수업을 지루하게 만든 적도 있었지만 그나마 지금은 그것마저도 없어졌다(재미있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도라지, 아리랑, 천안삼거리 같은 곡들이 초등이나 중등교과에 계속 나온다는 점이다) 이제는 초등학교 교과서도 중등처럼 검인정 교과서 체재로 출판사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편집, 출판되고 있는데 어느 교과서건 간에 노래는 별로 없고 무슨 창의 활동이니 공동 활동이니 하며 비음악적이고 비예술적인, 마치 스카우트 활동과 같은 비슷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교육의 방향이 <생활화>이니 <창의교육>이나 해서 예술과목까지 준비 없이 한 방향으로 모는 것도 난센스이지만 감성을 통한 교육으로 발현되는 지··체의 가치를 실현하는 음악 교과의 특성을 간과한 교육정책자들의 답답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체육시간에는 일단 몸을 풀고 나서 여러 활동으로 들어가듯이 음악도 노래를 불러 귀와 목을 열고 내청을 열은 다음에 다양한 활동으로 들어가야 순서가 맞지 않을까요? 요즈음 음악 수업 시수도 전에 비해 반으로 줄어 수업 시간 자체가 별로 없는데다가 집중 이수제이니 자율학기제 등의 이름으로 아예 음악 수업이 없어지거나 융합교육이라는 이름아래 음악이 다른 과목의 보조과목으로 전락하여 존재가치가 퇴색되었거나 아예 고등학교에서는 4가지 예술과목(무용, 연극, 음악, 미술) 중에서 2과목만 선택하면 되니 음악이 차지할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니 당연히 노래를 배우고 부를 기회조차 사라지고 정서적으로 덜 안정된 사회가 되어 여러 가지 예측 불가능한 사건 사고가 자꾸 생기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들은 부지불식간에 흥얼거려진다. 가요는 유행이 지나면 식상해 다시 안 부를지언정

요즘엔 가곡이 자취를 감춰 잘 안 부르기도 하지만 듣기도 어렵다. 듣기만 해도 눈 이슬이 맺혔던<고향의 봄>, 나라와 민족사랑에 몸이 뜨거워졌던 <선구자>, 미래를 향한 희망으로 가슴이 벅찼던 <희망의 나라로> 그 외에 정겨웠던 가곡 봉선화’, ‘산들바람등도 기억 속에 잊혀져 부르지도 않고 교과서에서도 사라져 버렸다. 한마디로 일제에 협력한 작곡가들의 작품이라는 족쇄에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서양음악이 처음 들어오던 시절, 작곡가들이 음악을 처음 접한 곳은 교회이거나 근대식 학교나 음악의 꿈을 위해 일본이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민족의 아픔을 승화시킬 수 있는 국민적 가곡을 만들어 조국을 잃은 민족의 애환을 달랬을 것이다. 그들은 일생동안 음악활동을 통해 근대 한국의 문화를 열은 주인공들인데 자의이던 타의이던 일본을 위한 곡을 몇 곡 썼거나 연주했다고 해서 도매 급으로 곡을 금지하며 교과서에서 빼거나 공공장소에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우리는<고향의 봄>을 부르며 사꾸라가 핀 도쿄를 생각하지 않았고, 선구자를 부르며 만주국을 생각하지 않았고 희망의 나라를 부르며 대동아전쟁을 생각하지 않았다. 민족의 독립을 염원했던 모두가 총칼을 들고 싸우는 독립군이 될 수 없었으나 음악으로나마 독립을 염원했던 예술가들에게 가해진 여러 압력은 어찌할 수 없었던 시대적 착오였고 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음악협회 등에 소속되어 일본의 강압적인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예술가들~ 특히 가사가 있어서 쉽게 화살을 받을 수밖에 없는 가곡 작곡가들에게 칼을 들이대는지 모르겠다. 그 노래들은 일제강점기 시절과 한국전쟁, 그리고 배고팠던 6~-70년대에 마음을 위로한 자양분이었다. 그런데 일부 호사론자들은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반역자로 몰아붙이고 예술가곡을 부르지 못하게 한 꼴이 돼버렸다. 본인들이 싫으면 부르지 말면 될 것이지 순수하게 부르는 모든 사람의 노래를 강압적으로 막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우리의 슬픈 역사라는 것만을 인식하면서) 아울러 감성적 선율과 선정적 효과를 통해 억지로 마음을 끌어내는 곡 보다는 슈베르트 가곡 같이 진정한 의미의 예술성을 담아 형식, 화성, 시적 표현, 피아노와의 공조 등을 제대로 담은 가곡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언젠가부터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불편하게 되었다. 애국가를 바꾸자, 없애자, 새로 만들자며 여러 정략적, 정치적 선동적 얘기들이 난무했다. 폴란드의 세계적 작곡가 펜데레츠키가 한국에 와서 애국가가 어느 나라 노래와 비슷하다고 발언한 것이 불씨가 되면서 불가리아 민요를 표절했다는 설이 등장했다. 필자는 그 진위를 알아보기 위해 마침 불가리아의 음악학자와 가까운 사이라 애국가 악보를 보내어서 의견을 물었는데 그의 답은 시작하는 두 마디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자기나라 민요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런데 요즈음 나치부역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한때 우리 민족의 위상을 세상에 빛낸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안익태에게 마녀사냥 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일제의 강압 통치와 명령을 따라 어쩔 수 없었던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는 생각은 전혀 보이지 않아 우리사회가 아직 미성숙한 사회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자.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운동선수들도 있었다. 그 중에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하여 시상대에 올라 찍은 우리나라 선수의 일장기를 없앴던 신문기사 사건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분명 그들은 일본 국가대표로 뛰었던 선수였고 조선체육회에 소속되어 출전했던 선수이므로 친일인명사전에 넣어야 하는데 친일조사위원회에서 아예 체육인은 조사하지도 않았고 넣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나약한 음악인에게만 날카로운 반역의 칼을 들이대고 있는 모습이다. 근대 서구 독재자의 원조 격인 스페인 프랑코치하에서 수십 년 간 망명 투쟁을 한 공산당 당수산티아고 카리요는 정치에 복귀하면서 민주화에 참여하는 모든 정치가들에게 과거를 파헤치지 말 것을 호소했다. 왜냐하면 과거를 파헤치는 것은 과거의 갈등을 되풀이 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를 파헤쳐 바로잡기보다는 무언가 다른 정략적, 의도적 목적으로 더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우리나라처럼 민요, 가요, 가곡이 완벽히 분리된 나라도 없다. 가까운 중국, 북한을 비롯한 동남아시아는 팝송을 제외하고는 민요와 가곡, 가요가 별 구분 없이 하나의 노래로 불려진다. 그런 나라들은 자기 나라 민요와 비슷한 풍의 가요를 불러서 현대 젊은이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욕구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풍의 음악으로 옮겨가지만 미국의 팝송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아시아적인 정서가 배어있는 춤과 무대로 잘 짜여진 K-pop이 새로운 팝 음악 트렌드로 자리 잡으며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며 동화되어 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각 장르마다 명확한 구분을 좋아하여 학교에서 가르치는 노래, 가수가 부르는 노래, 국악인이 부르는 노래, 그리고 팝송 등이 명확히 나뉘어져 있다. 문제는 이러한 노래들이 골고루 섞여 불리어야 하는데 검은색 아니면 흰색에 편중되어 회색을 싫어하는 우리의 특성상 여러 장르의 노래들이 혼재된 것은 그다지 용납되지 않는 것 같다. 단일민족이라는 한국인의 DNA를 분석해 보아도 한··3개국의 유전자가 한국 46%, 일본 26%, 중국 26% 정도 섞여 있음이 말해주듯 우리처럼 작고 좁은 나라에서는 이해의 폭을 넓혀 다양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미래를 지향하는 문화선진국이 되는 지름길이 아닐까?

합창은 함께 부르는 노래다. 다성부로 부르던 떼창(유니즌)처럼 한성부로 부르던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모두 부르는 합창 레퍼토리가 필요하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부르고 선생과 학생이, 남자와 여자가, 근로자와 사용자 등 다양한 계층에서 함께 부를 만한 합창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울러 음악의 순 예술적 기능인 미의 완성만 강조하지 말고 사회적 기능인 힐링과 소통을 다하기 위해 가장 사회적인 예술이고 사회적 기능이 뛰어난 예술인 합창이 많이 불리어져야 한다. 음악이 사회적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말하는 불행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고양이와 음악중에서 사람들은 모두 음악보다는 고양이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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